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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벨 바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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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누벨 바그는 195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일어난 영화 운동으로, 기존 영화 제작 방식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기법과 주제를 탐구했다. 알렉상드르 아스트뤼크의 '카메라-스타일로' 선언과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등 '카이에 뒤 시네마' 평론가 출신 감독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작가주의를 통해 감독의 개성을 강조하고, 저예산 영화 제작, 즉흥적인 촬영 기법, 실존주의적 주제 등을 활용했다. 누벨 바그는 프랑스 사회의 변화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을 반영하며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1960년대 후반 내부 갈등으로 점차 쇠퇴했다. 누벨 바그는 이후 유럽 영화와 한국 영화 등 전 세계 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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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벨 바그
개요
명칭프랑스 뉴 웨이브
기타 명칭누벨 바그
로마자 표기Nubel Bageu
시기
활동 기간1958년부터 1960년대 후반
국가
국가프랑스
주요 인물
주요 인물장뤼크 고다르
알랭 레네
아녜스 바르다
앙드레 바쟁
자크 데미
프랑수아 트뤼포
에리크 로메르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영향
영향이탈리아 네오레알리즘
필름 누아르
고전 할리우드 영화
시적 리얼리즘
작가주의
파리 시네필 문화
실존주의
알프레드 히치콕
예술 영화
뉴 레프트
베르톨트 브레히트
영향 받은 영화 운동
영향 받은 영화 운동일본 뉴 웨이브
LA 반란
뉴 할리우드
뉴 저먼 시네마
시네마 노보
도그마 95
영국 뉴 웨이브
유고슬라비아 블랙 웨이브
뉴 성실성
멈블코어
관련 용어
관련 용어(카이에 뒤 시네마)
(양질의 전통)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

2. 정의

프랑수아 트뤼포 (1965년)


'''누벨 바그'''(nouvelle vague|누벨 바그fra, 새로운 물결)라는 용어는 원래 1957년 프랑스 주간지 『렉스프레스』에서 프랑수아즈 지루가 전후 세대의 사회적 변화를 가리키며 사용한 말이었으나[23], 이후 영화 평론가 피에르 비야르가 프랑스 영화의 새로운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차용하면서 영화 용어로 정착되었다.

넓은 의미에서 누벨 바그는 기존 영화 제작 시스템, 즉 촬영소 중심의 제작 방식이나 조감독 등의 도제식 경험을 거치지 않고 데뷔한 젊은 감독들이 만든 일련의 영화를 가리킨다. 이들 영화는 주로 현지 촬영(로케이션)을 중심으로 하고, 동시 녹음 방식을 사용하며, 때로는 즉흥적인 연출을 시도하는 등의 방법론적 공통점을 특징으로 한다.

좁은 의미로는 영화 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fra)의 편집장이었던 앙드레 바쟁의 영향을 받은 젊은 비평가 출신 감독들, 소위 '카이에파' 또는 '우안파' 감독들과 그들의 작품을 지칭한다. 이 그룹에는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다큐멘터리 영화에 뿌리를 둔 '좌안파' 감독 그룹(알랭 레네, 아녜스 바르다 등) 역시 일반적으로 누벨 바그의 범주에 포함시켜 통칭하는 경우가 많다.

누벨 바그의 사상적 기반에는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이 1948년 주창한 '카메라-펜'(caméra-stylofra)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는 영화가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을 넘어, 감독이 자신의 사상과 세계관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예술 형식, 즉 '카메라를 펜처럼' 사용하는 창작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선언이었다.[5][6] 이러한 생각은 이후 『카이에 뒤 시네마』의 젊은 비평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프랑수아 트뤼포1954년 발표한 평론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에서 당시 주류였던 문예 영화, 소위 '고품질 영화'(cinéma de qualitéfra)의 인습적인 각본과 연출을 강하게 비판하며 감독 개인의 독창성과 영화적 표현을 강조하는 작가주의(politique des auteursfra) 이론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누벨 바그 운동의 실질적인 선언문으로 평가받는다.[7] 작가주의는 감독을 영화의 진정한 '작가'로 보고, 그들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일관된 스타일과 주제 의식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은 장 르누아르, 장 비고 같은 프랑스 거장뿐만 아니라, 당시 예술적으로 저평가되던 오슨 웰스, 존 포드, 알프레드 히치콕 등 할리우드 감독들의 작가적 역량을 재평가하기도 했다.

누벨 바그는 이러한 비평적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기존 프랑스 영화계의 관습적인 제작 방식과 미학에 도전하며 새로운 영화 언어를 모색하려는 시도였다. 특히 프랑스 영화계에서 높이 평가받던 고상하고 문학적인 시대극 스타일의 '고품질 영화'가 관객을 수동적인 위치에 놓는다고 비판하며, 보다 자유롭고 현실에 밀착한 영화 제작 방식을 추구했다. 저예산 영화 제작 방식은 이러한 실험을 가능하게 했으며, 감독들이 보다 본질적인 예술 형태로서 영화에 접근하도록 도왔다.

2. 1. 카이에 뒤 시네마(우안파) 감독

좁은 의미에서 누벨 바그는 영화 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앙드레 바쟁의 영향을 받은 젊은 비평가 출신 감독들(카이에파 또는 우안파)과 그 작품들을 지칭한다. 주요 감독으로는 장 뤽 고다르[22],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가 있으며, 이 외에도 피에르 카스트, 자크 드니올발크로즈, 알렉상드르 아스트뤽, 뤽 물레, 장 두셰 등이 이 그룹에 속한다. 이들은 흔히 '우안파'로 불리며, 동시대에 활동했던 좌안파 감독들과는 구별되는 경향을 보였다.

2. 2. 좌안파 감독

아녜스 바르다 (베니스 영화제), 1962


누벨 바그 내에는 크게 두 그룹이 존재했는데, 하나는 카이에 뒤 시네마|카이에 뒤 시네마fra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더 유명하고 재정적으로 성공했던 우안파(클로드 샤브롤, 프랑수아 트뤼포, 장뤼크 고다르 등)이고, 다른 하나가 좌안파이다.[18] 하지만 두 그룹이 서로 대립하지는 않았으며, 카이에 뒤 시네마|카이에 뒤 시네마fra는 좌안파 영화를 옹호하기도 했다.[19]

좌안파 감독들은 우안파보다 나이가 많았고, 영화를 문학 등 다른 예술과 유사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모더니즘 영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누벨 바그 감독들과 공통점을 가졌다. 이들은 1950년대에 등장하여 젊은 관객들의 지지를 받았다.[18]

몽파르나스 근처에서 모였던 알랭 레네, 자크 드미, 아녜스 바르다, 크리스 마르케르, 장 루슈 등, 주로 다큐멘터리(기록 영화) 분야에서 활동했던 감독들을 좌안파라고 부른다. 이들은 보헤미안적인 삶과 실험 영화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으며, 문학 및 조형 예술에도 깊은 조예를 보였다. 또한 정치적으로 좌익 성향을 공유하며 서로 협력하는 경향이 있었다.[19] 장 피에르 멜빌, 알랭 로브그리예, 마르그리트 뒤라스 등도 이 그룹과 연관이 있으며[20], 문학에서의 누보 로망 운동 역시 좌안파 스타일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18]

대표적인 좌안파 영화로는 ''라 푸앵트 쿠르트'', ''히로시마 내 사랑'', ''제 3의 눈'', ''지난 해 마리엔바드에서'', ''유럽 특급 열차'' 등이 있다.

2. 3. 기타 누벨바그 관련 감독

누벨 바그 운동에는 카이에 뒤 시네마를 중심으로 한 우안파나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한 좌안파 외에도, 넓은 의미에서 누벨 바그의 영향을 받았거나 관련 인물로 분류되는 여러 감독들이 있다. 이들은 촬영소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고 로케이션 촬영, 동시 녹음, 즉흥 연출 등 새로운 영화 제작 방식을 시도하며 프랑스 영화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대표적인 관련 감독들은 다음과 같다.

또한, 누벨 바그의 직접적인 활동 시기 이후에 등장했지만 그 정신과 방법론을 계승하여 "늦게 온 누벨 바그"로 평가받는 감독들도 있다. 여기에는 장 외스타슈, 필리프 가렐, 장클로드 브리소, 자크 드와이옹, 클로드 밀러 등이 포함된다.

3. 발생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는 정치적,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사회 전반적으로 기존의 가치관과 질서에 대한 회의감이 퍼져나갔다.[10][11] 이러한 분위기는 영화계에도 영향을 미쳐, 당시 주류를 이루던 고전적이고 문학적인 프랑스 영화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누벨 바그는 바로 이러한 기존 영화 제작 방식, 특히 관객을 정해진 줄거리에 수동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경향에 대한 비판과 반란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영화 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젊은 비평가들이 누벨 바그 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등은 앙드레 바쟁의 영향을 받아 영화 감독을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작품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로 보는 작가주의를 내세우며 새로운 영화 미학을 모색했다.[7] 이들은 장 르누아르, 장 비고와 같은 자국의 거장뿐 아니라 오슨 웰스, 존 포드, 알프레드 히치콕 등 할리우드 감독들의 작품에서도 작가적 개성을 발견하고 재평가하며 자신들의 영화 철학을 다듬었다.

특히 프랑수아 트뤼포가 1954년 《카이에 뒤 시네마》에 발표한 평론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은 당시 프랑스 영화계의 주류였던 이른바 '고품질 영화'(cinéma de qualitéfra)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누벨 바그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글은 큰 파장을 일으키며 새로운 영화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누벨 바그'(nouvelle vague, 새로운 물결)라는 용어는 본래 1957년 주간지 《렉스프레스》에서 전후 세대의 새로운 경향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나[23], 이후 젊은 감독들의 새로운 영화 제작 경향을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누벨 바그 감독들은 기존의 대규모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벗어나 저예산으로 현지 촬영을 하고, 동시녹음, 즉흥 연출 등 실험적인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2]이나 미국의 독립 영화 작은 도망자[8] 등에서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기존 영화 문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혁신적인 스타일을 특징으로 한다. 클로드 샤브롤의 《르 보 세르주》(1958)를 시작으로,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와 고다르의 《숨 막히게》(1960) 등이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누벨 바그는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프랑스 영화계를 넘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영화 운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3. 1. 이론적 배경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은 1948년 3월 30일 잡지 ''L'Écran Françaisfra''에 발표한 선언문 "새로운 아방가르드의 탄생: 카메라-스타일로(Naissance d'une nouvelle avant-garde : la caméra-stylofra)"를 통해 누벨 바그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5] 이 글에서 아스트뤽은 영화가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을 넘어, 회화소설처럼 작가(영화 감독)가 자신의 사상이나 관념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영화 제작 방식을 '카메라-만년필'(caméra-stylofra), 즉 카메라로 글을 쓰는 것에 비유하며, 영화가 감독 개인의 사유와 강박 관념까지 담아낼 수 있는 표현 형식임을 강조했다.[6]

이러한 생각은 이후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등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의 젊은 비평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잡지의 공동 창립자이자 이론가인 앙드레 바쟁의 지도를 받으며 활동했다. 바쟁은 이 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그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설립자 앙리 랑글루아는 누벨 바그의 두 아버지 격으로 평가받는다.

바쟁과 《카이에 뒤 시네마》 비평가들은 감독을 영화의 창조적인 주체, 즉 '작가'로 간주하는 작가주의(auteur theory, 프랑스어 원어는 La politique des auteursfra, '작가들의 정책'이라는 의미) 이론을 발전시켰다.[7] 작가주의는 영화 감독이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주제 의식을 작품 전체에 일관되게 반영하는 예술가라고 보는 관점이다. 이들은 장 르누아르장 비고와 같은 프랑스 감독뿐만 아니라, 당시 예술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오슨 웰스, 존 포드, 알프레드 히치콕, 니콜라스 레이 등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 내의 감독들에게서도 작가적 개성과 예술적 성취를 발견하고 높이 평가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누벨 바그 운동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젊은 비평가들이 이러한 작가주의 이론을 실제 영화 제작을 통해 구현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트뤼포는 1954년 1월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기고한 비평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Une certaine tendance du cinéma françaisfra)"에서 당시 프랑스 영화계 주류였던 문학적 각색 위주의 '잘 만들어진 영화'(cinéma de qualitéfra)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러한 영화들이 감독의 개성보다는 시나리오 작가의 의도에 종속되어 있으며, 관객을 수동적인 위치에 머무르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 글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트뤼포에게 "프랑스 영화의 무덤 파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안겨주었지만, 결과적으로 누벨 바그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사실상의 선언문 역할을 했다.

또한, 누벨 바그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2]과 고전 할리우드 영화[2], 특히 찰리 채플린, 알프레드 히치콕, 오슨 웰스, 하워드 혹스, 존 포드, 샘 풀러, 돈 시겔[1] 등 작가주의 관점에서 재평가된 감독들의 영향을 받았다. 루스 오킨, 레이 애슐리, 모리스 엥겔이 만든 미국의 독립 영화 작은 도망자(1953) 역시 트뤼포에 의해 누벨 바그의 탄생에 영감을 준 작품으로 언급되었다.[8]

누벨 바그는 동시대 프랑스의 다른 문화 운동과도 연관성을 가진다. 장 폴 사르트르실존주의, 알랭 로브그리예 등의 누보 로망, 롤랑 바르트 등의 누벨 크리틱,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구조주의 등 1950년대와 1960년대 프랑스 지성계를 풍미했던 새로운 사상 및 예술 경향들과 동시대적으로 발생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특히 누보 로망 작가인 알랭 로브그리예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직접 영화 시나리오를 쓰거나 감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누벨 바그의 핵심 사상은 문학이나 철학의 직접적인 영향보다는 아스트뤽의 '카메라-만년필' 이론과 바쟁 및 《카이에 뒤 시네마》 그룹이 발전시킨 작가주의에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작가주의(La Politique des Auteursfra)'라는 용어 자체도 1955년 트뤼포가 《카이에 뒤 시네마》에 쓴 글 "알리바바와 작가주의(Ali Baba et la 'Politique des Auteurs'fra)"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3. 2. 사회적 배경

'''누벨 바그'''(nouvelle vague, 새로운 물결)라는 명칭은 1957년 10월 3일자 프랑스 주간지 『렉스프레스』(L'Express)에 프랑수아즈 지루가 "새로운 물결이 온다!"라고 쓴 기사에서 유래했다.[23] 이 잡지는 이후 "누벨 바그의 잡지"를 표방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물결'은 본래 영화 운동을 지칭하기보다는 당시 사회적 관심사였던 전후 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간극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영화 용어로서 이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영화 잡지 『시네마 58』의 편집장 피에르 비야르로, 1957년 2월호에서 프랑스 영화의 새로운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사회는 정치적,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고, 이는 사회 전반에 걸쳐 전쟁 이전의 전통으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낳았다. 영화계 역시 고전적인 프랑스 영화, 특히 문학 작품을 각색한 서사 중심의 영화 제작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 누벨 바그는 이러한 기존의 영화 제작 방식, 특히 관객을 정해진 줄거리에 수동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경향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 누벨 바그 감독들은 프랑스 영화계에서 높이 평가받던 소위 "고품질 영화"(cinéma de qualité), 즉 문학적이고 고상한 시대극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누벨 바그 감독들은 젊은 관객들의 공감을 얻으며 인기를 끌었다. 대부분 1930년대에 태어나 파리에서 성장한 이들은 동시대 젊은이들의 삶과 감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영화 속에서 패션, 도시 생활, 파티 등 당대 젊은이들의 문화를 섬세하게 묘사했다.[9]

당시 프랑스 사회의 이면에는 알제리 전쟁의 장기화와 식민지 문제, 전쟁 후유증 등으로 인한 불안과 불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본의 영화 배급사 신외영의 하야시 사호코는 누벨 바그를 분석하며 "겉으로는 화려한 파리의 공기 밑바닥에, 검은 불안과 분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누벨 바그가 단순히 영화 운동에 그치지 않고, 당시 프랑스 젊은이들의 전반적인 생각과 행동 양식을 반영하는 사회적 현상이었으며, 특히 『네 멋대로 해라』의 주인공 미셸 푸아카르(장폴 벨몽도 분)와 같은 인물들은 당시 사회의 무거운 분위기를 깨뜨리는 힘을 상징했다고 평가했다.[27] 즉, 누벨 바그는 전후 프랑스 사회의 경직된 분위기와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반항 정신, 그리고 새로운 표현 방식에 대한 갈망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표출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4. 영화 기법

1968년의 장 뤽 고다르


누벨 바그 영화들은 긴 트래킹 숏과 같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표현 방식을 특징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장 뤽 고다르의 1967년 영화 ''주말''에 등장하는 유명한 교통 체증 장면이 대표적이다. 또한 이 영화들은 개인을 강조하고 인간 존재의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실존주의적 주제를 자주 다루었다. 아이러니와 풍자가 가득하며, 다른 영화들을 인용하거나 언급하는 경향도 보였다.

많은 누벨 바그 영화들은 빠듯한 예산으로 제작되었다. 친구의 아파트나 마당에서 촬영하고, 감독의 친구들을 배우나 스태프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비 역시 즉흥적으로 사용해야 했는데, 예를 들어 쇼핑 카트를 이용해 트래킹 숏을 촬영하기도 했다.[14] 필름 비용 문제도 중요했기 때문에, 필름을 아끼려는 노력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À bout de souffle프랑스어)가 대표적인 예다. 영화가 너무 길어 상영 시간을 줄여야 했을 때, 고다르는 장 피에르 멜빌의 제안을 받아들여 롱테이크로 촬영된 장면 일부를 점프 컷을 사용해 잘라냈다. 매끄럽지 않은 부분을 테이크 중간에서 잘라내는 방식은 필름을 절약하기 위한 실용적인 결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인 스타일 선택이기도 했다.[15]

누벨 바그 영화의 스타일은 즉흥적인 대사, 빠른 장면 전환, 그리고 기존의 180도 카메라 이동 축을 깨는 촬영 기법 등을 통해 영화에 신선함을 불어넣었다. 많은 누벨 바그 영화에서 카메라는 정교한 이야기나 환상적인 이미지로 관객을 사로잡기보다는, 관객의 기대를 뒤엎거나 가지고 노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고다르는 이 운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받으며, 관객을 수동적인 관람 태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그의 영화 제작 방식은 매우 대담하고 직접적이었다.

고다르의 스타일은 당시 주류 영화계에 대한 저항이나, 관객의 순진함을 공격하는 도발적인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어떤 관점에서 보든, 누벨 바그가 보여준 도전적인 태도는 오늘날 영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등장인물이 제4의 벽을 깨고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기법은 현재는 흔하게 사용되지만,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다.

고전 프랑스 영화는 강력한 서사(내러티브)를 중시하며, 고다르가 비판했듯이 다소 억압적이고 결정론적인 줄거리 구조를 따랐다. 반면, 누벨 바그 감독들은 관객이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려 했다. 그들은 영화가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결국은 움직이는 이미지의 연속일 뿐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고자 했다. 이 때문에 장면들이 통일성 없이 단절적으로 이어지거나,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배우가 바뀌거나, 촬영 현장에 우연히 들어온 구경꾼이 엑스트라처럼 화면에 등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누벨 바그 기법의 핵심에는 제작비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가 겪었던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누벨 바그 감독들은 기존 영화 제작 방식에 대한 저예산 대안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앞선 세대인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감독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절반은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에, 절반은 새로운 영화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누벨 바그 감독들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예술적 비전을 스크린에 담아내려 했다.

결론적으로, 유럽 예술 영화로서 누벨 바그는 영화 제작 기술 자체를 하나의 스타일로 삼는 데 집중했다. 누벨 바그 감독들은 무엇보다 작가로서 자신의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독자적인 시각을 드러내고자 했다.[16] 이러한 영화들은 지식의 대상으로서 기존 영화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요소들, 즉 "공간과 시간의 연속성, 서사 및 문법적 논리, 표현된 세계의 자명함" 등을 거부하고 해체하려 했다. 이를 통해 감독들은 마치 소설가가 에세이를 쓰듯 자신의 생각을 영화로 표현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17]

5. 전개 및 종언



누벨 바그 운동의 이론적 토대는 알렉상드르 아스트뤼크가 1948년 발표한 "새로운 아방가르드의 탄생: 카메라-스타일로"에서 마련되었다. 그는 이 글에서 영화가 감독 개인의 사상과 스타일을 표현하는 매체라는 '카메라-펜'(caméra-stylo|카메라 스틸로fra) 개념을 제시했다.[5][6] 이 아이디어는 영화 잡지 Cahiers du cinéma|카이에 뒤 시네마fra의 비평가 그룹, 특히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등에 의해 작가주의(La politique des auteurs|라 폴리티크 데 조퇴르fra) 이론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앙드레 바쟁앙리 랑글루아의 영향을 받아 감독을 영화의 진정한 '작가'(auteur|오퇴르fra)로 보고, 감독 개인의 비전과 스타일을 중시했다.[7] 또한 장 르누아르, 장 비고뿐 아니라 오슨 웰스, 존 포드, 알프레드 히치콕 등 할리우드 감독들의 예술성을 재평가했다. 트뤼포는 모리스 엥겔의 미국 독립 영화 ''작은 도망자''(1953)가 누벨 바그의 독립 영화 제작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하기도 했다.[8]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Cahiers du cinéma|카이에 뒤 시네마fra 출신 감독들은 직접 영화 제작에 나섰고, 클로드 샤브롤의 《르 보 세르주》(1958),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 장 뤽 고다르의 《숨 막히게》(1960) 등 초기작들이 연이어 비평적,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서 누벨 바그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영화들은 때로 관객이 쉽게 동일시하기 어려운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누벨 바그는 대략 1958년부터 1962년 사이에 전성기를 맞았다.[10][1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변화된 프랑스 사회 분위기 속에서 누벨 바그 영화들은 젊은 관객들의 공감을 얻었으며, 파리의 풍경과 젊은이들의 삶을 생생하게 담아냈다.[9] 이 운동은 기존 프랑스 영화계의 주류였던 문학 각색 위주의 '고품질 영화'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으며, 저예산 영화 제작, 로케이션 촬영, 즉흥 연출, 동시 녹음, 핸드헬드 촬영, 점프 컷 등 실험적인 기법을 통해 기존 영화 문법에 도전했다. 이러한 경향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과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2] 누벨 바그 감독들은 찰리 채플린, 알프레드 히치콕, 오슨 웰스, 하워드 혹스, 존 포드, 샘 풀러, 돈 시겔 등을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1]

그러나 누벨 바그 운동의 정확한 범위에 대해서는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1961년 트뤼포는 누벨 바그를 특정 그룹이 아닌 일종의 '퀄리티'로 보며 광범위한 감독 목록을 제시했지만,[12] 고다르는 이후 Cahiers du cinéma|카이에 뒤 시네마fra 핵심 그룹만이 진정한 누벨 바그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동시대 감독들과 구분했다.[12]

운동으로서의 누벨 바그는 점차 쇠퇴했지만, 그 정신과 혁신적인 영화 언어는 후대 영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관련된 많은 감독들은 21세기까지도 활동을 이어갔다.[13]

5. 1. 초기



'''누벨 바그'''(nouvelle vague|누벨 바그fra, 새로운 물결)라는 명칭은 1957년 10월 3일 프랑스 주간지 『렉스프레스』에 프랑수아즈 지루가 "새로운 물결이 온다!"라고 쓴 것에서 유래했다고 여겨진다.[23] 처음에는 전후 세대와 이전 세대 간의 차이를 나타내는 사회적 용어였으나, 영화 잡지 『시네마 58』의 편집장 피에르 비야르가 1957년 2월호에서 프랑스 영화의 새로운 경향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면서 영화 용어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용어가 사용되기 전부터 누벨 바그의 움직임은 시작되었다. 알렉상드르 아스트뤼크는 1948년 "새로운 아방가르드의 탄생: 카메라-스타일로"라는 선언문에서 영화가 회화나 소설처럼 작가의 사상과 강박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카메라-펜'(caméra-stylo|카메라 스틸로fra) 개념을 제시했다.[5][6] 이는 이후 프랑수아 트뤼포와 Cahiers du cinéma|카이에 뒤 시네마fra 비평가들에 의해 발전된 작가주의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프랑수아 트뤼포1954년 1월 『카이에 뒤 시네마』에 발표한 평론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에서 당시 프랑스 영화계 주류였던 소위 '고품질 영화'(cinéma de qualité|시네마 드 칼리테fra)의 문학적 각색과 각본가 중심의 제작 시스템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 글은 누벨 바그의 사실상 선언문으로 평가받는다. 트뤼포를 비롯해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등 『카이에 뒤 시네마』 출신 비평가들은 영화 감독을 영화의 '작가'(auteur|오퇴르fra)로 보고, 감독의 개인적인 스타일과 비전을 중시하는 작가주의(La politique des auteurs|라 폴리티크 데 조퇴르fra, 작가 정책)를 주장했다. 이들은 앙드레 바쟁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설립자 앙리 랑글루아의 영향을 받았으며, 장 르누아르, 장 비고뿐만 아니라 오슨 웰스, 존 포드, 알프레드 히치콕 등 할리우드 감독들의 예술성을 재평가했다.[7] 트뤼포는 또한 모리스 엥겔의 미국 독립 영화 ''작은 도망자''(1953)가 누벨 바그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8]

누벨 바그의 첫 작품으로는 흔히 『카이에 뒤 시네마』 출신 감독들(카이에파) 중 한 명인 자크 리베트의 단편 영화 《목동의 일격》(Le Coup du Berger, 1956년)이 꼽힌다. 이 작품에는 샤브롤, 트뤼포, 고다르, 로메르 등 동료들이 제작과 연기에 참여했다. 이후 트뤼포의 《개구쟁이들》(Les Mistons, 1957년), 고다르와 트뤼포가 공동 연출한 《물의 이야기》(Une histoire d'eau, 1958년) 등 단편 영화 제작이 이어졌다.

최초의 누벨 바그 장편 영화로는 클로드 샤브롤의 《아름다운 세르주》(Le Beau Serge, 1958년 촬영, 1959년 1월 개봉)가 전통적으로 인정받는다.[24] 비록 연대기적으로는 아녜스 바르다의 《라 푸앵트 쿠르트》(La Pointe Courte, 1955년)가 더 앞서지만, 이 영화는 오랫동안 상업적으로 개봉되지 못했다. 샤브롤의 《아름다운 세르주》는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와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프랑스 개봉 후 상업적으로도 성공했으며, 장 비고 상을 수상했다.

1959년은 누벨 바그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해였다. 3월에는 샤브롤의 두 번째 장편 《사촌들》(Les Cousins)이 개봉했고, 5월에는 트뤼포의 자전적인 영화 《400번의 구타》(Les Quatre Cents Coups)가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25] 같은 해 7월, 《사촌들》은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또한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 역시 칸 영화제에서 상영되어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영화들은 누벨 바그를 세계 영화계에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60년 3월에는 장 뤽 고다르의 첫 장편 영화 《네 멋대로 해라》(À bout de souffle|아 부 드 수플fra)가 개봉했다.[29] 프랑수아 트뤼포의 원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즉흥적인 연출, 점프 컷의 과감한 사용 등 혁신적인 기법으로 큰 화제를 모으며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15] 고다르는 주인공 미셸 푸아카르(장폴 벨몽도 분)를 통해 기존 영화의 관습적인 주인공 상을 벗어나는 인물을 제시하며 젊은 관객들의 공감을 얻었다.[9][27]

이처럼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에 걸쳐 등장한 누벨 바그 영화들은 저예산 제작 방식, 로케이션 촬영 중심, 즉흥 연출, 동시 녹음, 핸드헬드 촬영, 점프 컷 등 기존 영화 문법에 도전하는 실험적인 기법들을 특징으로 했다.[14]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의 사회·경제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영화 제작 방식을 모색한 결과이기도 했으며,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도 받았다.[2] 누벨 바그 감독들은 이러한 기법을 통해 감독의 개성을 드러내고 현실을 포착하며 관객에게 새로운 영화적 경험을 제공하고자 했다.

『사촌들』 포스터


400번의 구타』 포스터

5. 2. 절정

누벨바그의 전성기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인물들이 활동하며 프랑스 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었다. 이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실험적인 시도를 통해 누벨바그 영화의 독특한 미학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5. 3. 종언

누벨 바그의 종언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그 시작 이상으로 논자에 따라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가장 짧게는 상술한 폭풍과 같은 동향이 일단락된 1960년대 초반으로 본다. 일반적으로는 트뤼포루이 말이 과격한 논쟁을 벌였던 1968년 5월 19일 칸 영화제에서의 파괴 사건까지를 "누벨 바그의 시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이 시점까지는 우안파와 좌안파의 면면들은 다소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운동으로서의 누벨 바그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고다르와 트뤼포의 반목으로 대표되듯이 관계가 소원해졌고, 밀월 관계와 공동 작업을 하나의 특징으로 하는 누벨 바그는 종언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즉흥 연출, 동시 녹음, 로케이션 중심을 수법적인 특징으로 삼고, 신선함과 생생함을 작품의 특색으로 하는 "누벨 바그의 정신"은 그 후에도 살아남아, 장 유스타슈, 필립 가렐, 장클로드 브리소, 자크 드와이옹, 클로드 밀러 등은 "칸 이후"에 등장하여 평가를 받은 작가들이지만, 모두 "늦게 온 누벨 바그"라는 평가를 받았다.

6. 영향

일본에서의 누벨 바그 영향으로는 1960년대 쇼치쿠오시마 나기사, 요시다 기주, 시나리오 작가 이시도 스쿠로 등의 작품 연출과 작풍이 프랑스 누벨 바그와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들의 영화를 "쇼치쿠 누벨 바그"로 내세운 것을 들 수 있다. 특히 1960년 공개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청춘 잔혹 이야기』는 쇼치쿠 누벨 바그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러나 오시마 나기사는 자신의 감독 작품 『일본의 밤과 안개』가 혹평을 받자 쇼치쿠와 대립했고, 이시도 스쿠로 등과 함께 쇼치쿠를 나와 독립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7. 주요 인물



누벨 바그 운동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영화 잡지 Cahiers du cinéma|카이에 뒤 시네마프랑스어의 평론가 출신 감독들이다.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등이 이 그룹의 핵심으로 꼽힌다.[7] 이들은 Cahiers du cinéma|카이에 뒤 시네마프랑스어의 공동 창립자이자 이론가인 앙드레 바쟁과 Cinémathèque Française|시네마테크 프랑세즈프랑스어의 창립자 앙리 랑글루아를 정신적 지주로 여겼다.[7]

이들은 비평 활동을 통해 감독이 영화의 작가로서 개인적인 비전과 스타일을 담아야 한다는 작가주의 개념을 발전시켰고[7], 이는 누벨 바그 영화 제작의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누벨 바그 감독들은 장 르누아르, 장 비고와 같은 자국 감독뿐 아니라, 오슨 웰스, 존 포드, 알프레드 히치콕, 니콜라스 레이 등 당시 저평가되던 할리우드 감독들의 예술성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알렉상드르 아스트뤼크는 1948년 "카메라-스타일로"(caméra-stylo프랑스어) 개념을 통해 영화가 작가의 사상을 표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5][6] 다큐멘터리 감독 장 루슈나 초기 누벨 바그 작품 중 하나인 La Pointe Courte|라 푸앵트 쿠르트프랑스어(1955)를 만든 아녜스 바르다 역시 중요한 인물로 언급된다. 또한 트뤼포는 미국 독립 영화 ''작은 도망자''(1953)가 누벨 바그에 영감을 주었다고 밝히기도 했다.[8]

일반적으로 클로드 샤브롤의 ''미남 세르주''(1958)가 첫 누벨 바그 장편 영화로 간주되며, 이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와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60)가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누벨 바그는 세계적인 영화 운동으로 부상했다.

누벨 바그의 범위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는 감독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달랐다. 트뤼포는 1959년 이후 데뷔한 다수의 감독을 포함하며 넓은 의미의 '경향'으로 보았지만, 고다르는 Cahiers du cinéma|카이에 뒤 시네마프랑스어 출신의 핵심 감독들(트뤼포, 샤브롤, 리베트, 로메르, 본인)만이 진정한 누벨 바그라고 주장하며 알랭 레네, 아스트뤼크, 바르다, 자크 데미 등은 존경하는 동시대인일 뿐 누벨 바그와는 구별된다고 선을 그었다.[12]

누벨 바그와 관련된 많은 감독들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활동하며 21세기까지 영화 제작을 이어갔다.[13]

7. 1. 감독

7. 2. 배우

7. 3. 이론가

누벨 바그에는 "정신적인 아버지"라고 불리는 여러 인물이 존재한다. 앙드레 바쟁, 로베르토 로셀리니, 장 르누아르, 로제 레나르, 장 피에르 멜빌, 미조구치 겐지 등이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1950년대와 1960년대 프랑스에서는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한 실존주의현상학의 영향 아래, 문학에서는 누보 로망, 문예 비평에서는 누벨 크리틱, 철학에서는 구조주의 등이 등장했다. 누벨 바그 역시 이러한 동시대 사상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누보 로망의 대표 작가인 알랭 로브그리예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시나리오 작업뿐만 아니라 직접 영화를 연출하며 누벨 바그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누벨 바그의 반(反) 클라이맥스적 서사 방식 등은 문학보다는 영화, 특히 앙드레 바쟁이 높이 평가했던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네오레알리즘 영화들(무방비 도시, 독일, 0년)이나, 카이에 뒤 시네마의 젊은 비평가들이 열광했던 미국의 저예산 B급 영화(조셉 H. 루이스의 『권총마』, 니콜라스 레이의 『밤의 사람들』, 프리츠 랑의 『암흑가의 탄흔』 등)으로부터 더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누벨 바그의 핵심 사상은 히치콕-호크스주의로 대표되는 "작가주의"이다. 이 이론의 뿌리는 1948년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이 『레크랑 프랑세』(L'Écran Français|레크랑 프랑세프랑스어)에 발표한 논문 「Naissance d'une nouvelle avant-garde : la caméra-stylo|카메라=만년필, 새로운 전위의 탄생프랑스어」에서 찾을 수 있다. 앙드레 바쟁은 이 글에 깊이 공감하여 아스트뤽과 함께 『레크랑 프랑세』를 떠나 『라 르뷔 뒤 시네마』에 합류했다. 즉, 누벨 바그에 사상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실존주의보다는 작가주의 이론이었다. "La Politique des Auteurs|작가주의프랑스어"라는 용어 자체는 훗날 누벨 바그의 대표 감독이 되는 프랑수아 트뤼포1955년 2월, 『카이에 뒤 시네마』에 발표한 평론 「Ali Baba et la "Politique des Auteurs"|알리바바와 "작가주의"프랑스어」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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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The French New Wave : An Artistic School John Wiley & Sons, Incorporated
[3] 웹사이트 Une certaine tendance du cinéma français https://tcf.ua.edu/C[...] 2018-04-16
[4] 서적 Film History: An Introduction McGraw Hill
[5] 웹사이트 La Camera Stylo – Alexandre Astruc http://www.newwavefi[...] 1948-03-30
[6] 서적 The French New Wave: An Artistic School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7] 서적 Film History: An Introduction McGraw Hill
[8] 웹사이트 Lovers and Lollipops https://www.tcm.com/[...] "[[Turner Classic Movies]]"
[9] 서적 Film History: An Introduction McGraw Hill
[10] 서적 French cinema Oxford University Press 1985
[11] 서적 Dictionnaire du cinéma Larousse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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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뉴스 Living for Cinema, and Through It https://www.nytimes.[...] 2009-06-25
[14] 웹사이트 Back to the Scene: The Champs Elysees in Breathless and Beyond https://bonjourparis[...] 2013-03-11
[15] 웹사이트 Breathless (1960) https://www.imdb.com[...]
[16] 서적 Heretical empiricism https://books.google[...] New Academia Publishing 1988–2005
[17] 서적 Supporto, soggetto, oggetto: forme di costruzione del sapere dal cinema ai nuovi media, in Costruzione e appropriazione del sapere nei nuovi scenari tecnologici CUEN
[18] 서적 Film History: An Introduction McGraw Hill
[19] 문서 "Jill Nelmes, ''An Introduction to Film Studies'', p. 44. Routledge."
[20] 웹사이트 "Donato Totaro, ''Offscreen'', ''Hiroshima Mon Amour'' review, 31 August 2003. Access date: 16 August 2008." http://www.horschamp[...]
[21] 웹사이트 New Wave Film.com http://www.newwavefi[...]
[22] 웹사이트 https://www.imdb.com[...]
[23] 웹사이트 FRANÇOISE GIROUD À PROPOS DE LA NOUVELLE VAGUE "[[INA]]"
[24] IMDb 영화 美しきセルジュ
[25] IMDb 영화 大人は判ってくれない
[26] 문서 "Begery, Benjamin. ''Reflections: Twenty-one cinematographers at work'', p. 200. ASC Press, Hollywood."
[27] 뉴스 「勝手にしやがれ」あの夏の衝撃 ジャンポール・ベルモンドの訃報に寄せて https://www.asahi.co[...] 2021-09-10
[28] 서적 影の部分 リトル・モア 2012-03-26
[29] IMDb 영화 勝手にしやがれ
[30] 웹사이트 松竹の映画製作の歴史 Part15 <松竹ヌーベル・バーグ> https://www.shochiku[...] 松竹株式会社
[31] 웹인용 Une certaine tendance du cinéma français https://tcf.ua.edu/C[...] 2018-04-16
[32] 서적 Film History: An Introduction McGraw H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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